[예술가가 말하는 모임 ⑥] 시각예술가 정이지 〈창작을 위한 만남〉 – 2부

2023년 1월 13일

[예술가가 말하는 모임 ⑥] 시각예술가 정이지 〈창작을 위한 만남〉 – 2부
시각예술가 정이지 X 시각예술가 유지영

 

 

유지영
2020년 8월에 #안전한미술계를요구합니다 성명문을 시작으로 저와 정이지 작가님을 포함한 몇 명이 작가님들과 함께 ‘루이즈 더 우먼’이라는 시각 예술 분야 여성 예술인 단체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그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네트워크를 발족한 각 운영진의 대의적인 이유는 같았지만 개인적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 초반에는 동료들과 터놓고 작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신뢰할 수 있는 여성 작가분들과 캐주얼한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 정도의 가벼운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사적인 모임에 가깝게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여성 작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버거움을 단체 차원에서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정이지
저는 반대였어요. 작가 간 교류는 어떤 모임이 없어도 정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은 찾아갈 의향이 있었기에 친밀한 교류를 위해서 어떤 곳에 소속되고 싶은 열망은 없었던 것 같아요. 미술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마주하면서 내 주관을 바탕으로 발언하다 보면 부딪히게 되는 벽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개인적 친분 관계는 별로 유효하거나 안전망이 되어주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성적인 차원에서의 교류이지 실질적인 차원에서의 안전과 신뢰를 당부하기는 어렵기에, 시스템을 갖춘 규모 있는 단체가 갖는 상징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가 더 컸어요. 그런데 단체를 운영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서로의 관계 맺으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일의 소중함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아요.

유지영
사적인 교류에서 출발해서 단체가 갖는 상징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저와는 반대의 과정을 거치셨네요.

 

 

정이지
맞아요. 개인으로 작업 활동을 할 때 예술가로서 태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옳지 않은 일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강경해야 할지, 어느 정도를 내가 감수해야 할지 그런 것들. 그런 작가의 태도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같이 겪으며 비교적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 대한 열망이 더 컸어요.

유지영
그러면 루이즈 더 우먼에서 맡아 진행하셨던 혹은 참여하셨던 프로젝트 중 작가님 기억에 오래 남는 것 하나를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정이지
저는 ‘포트폴리오 리뷰’라는 프로그램이 인상이 깊었어요. 포트폴리오 리뷰는 작가 여러 명이 한 그룹이 되어 리뷰어로 초청된 여성 큐레이터 및 평론가분께 포트폴리오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또 공유하는 자리예요. 저는 제 포트폴리오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었지만, 다른 분들의 정제된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그에 대한 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분의 시각을 내 관점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내 포트폴리오에서 부족한 점이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도 깨달을 수 있었고요. 그래서 이런 계기가 없었으면 평생 모르고 놓치고 살았을 부분들을 발견하게 됐고, 모여있다는 게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유지영
참여자로서 포트폴리오 리뷰 프로그램에 대해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는데, 반대로 루이즈 더 우먼을 운영하는 입장에서의 깨달은 점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멤버가 적을 때는 친밀도도 높고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몸집이 커진 만큼 규모에서 오는 장단점이 있을 거라 예상돼요. 조금은 데면데면 할 수도 있고 서로 잘 모르는 분들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교류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가님만의 노하우가 있었나요?

 

 

정이지
멤버분들의 참여도와 친밀감을 높이는 일환으로 제가 ‘짝언니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구상-진행했어요. 짝꿍 프로젝트랑 비슷한 건데요. 기존 멤버들끼리 이미 서로 친밀도가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멤버분들이 들어오게 되면, ‘나 빼고 다 친한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게 부끄럽다고 느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기존 멤버와 신입 멤버를 랜덤으로 매칭해서, 짝언니들이 짝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반대로 짝동생들은 짝언니에게 뭐든 편하게 물어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취지에서 만들었어요. 적응하기 어려울 때 실제로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든지 서로의 전시를 보러 간다든지 등의 어떤 역할을 부여했는데, 이를 계기로 오프라인 만남들이 여러 번 있었고 교류의 폭이 넓어질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다른 운영진분들이 사용하시는 최후의 수단 중 ‘호소문’이 은근 효과가 좋았어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분들도 많았고 분위기도 좋았는데 왜 후기가 이토록 없을까요’ 같은 글을 읽게 되면 뜨끔해서 뭔가 쓰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더라고요.

유지영
반대로 모임을 이끌어 나가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정이지
가장 어려운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각자의 작업인 것 같아요. 작업적으로 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면 바쁜 와중에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것이 어렵게 되잖아요. 그렇게 공백이 쌓이고 다시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게 귀찮아지기도 하고요. 이런 점이 약간 모순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오랜만에 들어와도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는 친밀한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어요.

 

 

유지영
그 부분은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다르게 해소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루이즈 더 우먼에 ‘라운드 크릿’이라는 프로그램 같은 경우, 6명 내외로 그룹을 지어서 온라인으로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잖아요. 이번 3기에 제가 참여했을 때 저희 그룹 중 첫 개인전을 앞둔 작가님이 도면과 작품 설치안을 올려주셔서 다 같이 실시간으로 그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적이 있어요. ‘천장에 달아서 설치할 때는 이런 게 생각보다 어려우니 주의하셔야 해요’, ‘을지로에서 살 수 있는 고리 중 이런 게 있는데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등 굉장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피드백들을 들을 수 있어서 재밌었거든요. 이렇게 당장 작업 활동하는데 필요한 조언과 격려,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자리가 그런 분들에겐 수요가 있을 것 같아요.

유지영
2020년과 비교했을 때 단체뿐 아니라 루이즈 더 우먼을 이루는 개개인도 성장했다는 점이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이제 루이즈 더 우먼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는데요. 찾아보면 미술 모임이나 네트워킹 플랫폼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혹시 AAD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콘텐츠 중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었나요?

정이지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보이스 디자인’에 흥미가 가더라고요. 미술은 비교적 정적이고 작가가 드러나기보단 한 발짝 물러나 있잖아요.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공연할 때 부러웠는데, 그런 것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게 좋아 보였어요. 루이즈 더 우먼도 시각 예술 분야의 커뮤니티다 보니까, 다른 분야의 예술 활동에 대한 호기심이 해소될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유지영
지금은 ‘위드 코로나’로 많은 행사가 다시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추세이지만, AAD도 루이즈 더 우먼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모임, 워크숍을 중점으로 운영이 될 예정인데요. 온라인 모임 혹은 워크숍을 운영하시거나 참여하실 때,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점이나 예상외로 새롭게 발견했던 점이 있었나요?

정이지
아무래도 온라인으로 모임을 진행했을 때 가장 큰 장점은 시간과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분위기만 잘 형성되면 인사이트나 재미를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좋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하지만 분위기가 온열 되는 시간은 온라인이 확실히 더 오래 걸려요. 눈을 마주치면서 얘기를 나누고 농담도 던지면서 상대방의 리액션을 크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 사람이 지금 즐거운지 확신할 수 없으니 더 조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지영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예술인에게 필요한 모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이지
저는 개인적으로 ‘예술인 정신 건강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워낙 번아웃에 노출되기 쉽고 자기가 곤경에 처한 걸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이기도 쉬워요. 그런데 주변을 보면 다 그러고 있으니까 ‘아 이게 보통이구나!’ 하면서 살다가 사태가 더 심각해지기도 해요. 이런 어려움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터부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고, 주변인에게 마음의 짐을 줄까 봐 말을 삼키게 돼요. 근데 알고 보면 정말 모두 거의 다 병원에 다니고 있어요. 이런 것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에 하곤 해요. 작업을 발전하고 개인으로서 성장하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마저 압박으로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래서 서로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 간 정신 건강을 돌보는 모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인터뷰이: 정이지 시각예술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적이고 친밀한 감정, 낭만적인 분위기와 여운을 그림으로 그리려 한다. 정물이나 풍경을 그릴 때에도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것이 그에게 사람들 간의 어떤 관계 혹은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몇번의 휘두름으로 볕과 그늘, 여러가지 다른 질감, 인물의 인상, 대기와 시간대를 만들어내는 그리기의 즐거움 또한 작업의 중요한 동력이다. 주요 전시로는 개인전 《Short Cut》(2019, 어쩌다갤러리2), 단체전 《THIS IS A FAVORITE WITH SUNSHINE》(2020, 의외의조합), 《That Has Ever Seen》(2020, 킵인터치) 등이 있다. 

인터뷰어: 유지영 시각예술가
서울과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유지영은 회화, 설치, 오브제를 통해 담는 것(틀)과 담기는 것(내용)의 관계를 다루며 시스템을 둘러싼 사용자의 욕망 구조를 돌아본다. 개인전 《시간들의 서랍(Closed Containers)》(2022, 리움미술관), 《Cupboard》(2021, ThisWeekendRoom)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시각 예술 분야 여성 예술인 네트워크 “루이즈 더 우먼(Louise the Women)”을 공동 창립하여 현재는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루이즈 더 우먼
루이즈 더 우먼(Louise the Women)은 시각 예술 분야 여성 예술인 네트워크로, 2020년 8월에 발촉하여 2022년 10월 현재 평면, 입체, 사진, 영상, 미디어, 일러스트, 기획, 비평 등 다양한 시각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140여 명의 여성 예술인들의 연결과 성장을 지원하며 여성주의와 창작의 선순환 구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말하는 모임〉 인터뷰 시리즈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예술로〉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 인터뷰 시리즈 사진 촬영은 배우 문학진 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