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착시:  ‘좋아요’는 내가 누른걸까? 시스템이 시킨 걸까?

2025년 6월 12일

 

디지털 기술은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방식까지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죠. 그 변화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점점 달라지고 있는 인식을 자각하지 못한 채 디지털 세계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그런 흐름에 잠시 제동을 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인도네시아의 아티스트 그룹, 트로마라마입니다.

트로마라마는 디지털 미디어가 사회의 인식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언어와 텍스트, 유머, 질서, 상호작용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한 영상과 설치,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객 참여 등의 방식으로 그 문제의식을 풀어냅니다.

지난 2025년 5월 24일까지, 트로마라마는 송은에서 국내 첫 개인전 《Ping Inside Noisy Giraffe》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 AAD 웹진에서는 이들의 여러 작업 가운데 2024년의 퍼포먼스 작품 〈Banting Tulang〉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Banting Tulang〉은 매주 토요일, 파란색 그물 구조물 안에서 진행되었습니다. 8명의 퍼포머들은 각자 손목에 스마트 기기를 착용한 채 등장했는데요, 이 기기는 SNS에 ‘#pleasure(즐거움)’라는 해시태그가 게시될 때마다 진동이 울리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퍼포머들은 손목에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고무공과 금속 구슬을 벽과 바닥에 던지는 동작을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뜻과 거기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이번 웹진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즐거움’의 진실: 〈Banting Tulang〉

 

AAD
이번 작업 〈Banting Tulang〉은 제목부터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표현은 어떻게 접하게 되어 작품과 연결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트로마라마
〈Banting Tulang〉은 인도네시아어입니다. ‘Banting’은 ‘세게 던지다’, ‘Tulang’은 ‘뼈’를 뜻합니다. 직역하면 ‘뼈를 던지다’라는 의미가 되겠네요. 관용적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육체노동이나 고된 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Banting Tulang〉은 끊임없는 노동의 상태를 시각화한 행위 기반 퍼포먼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AD
제목은 ‘뼈가 내려앉을 만큼 일한다’라는 뜻쯤 되겠네요. 고무공을 바닥이나 그물 벽에 계속 던지는 모습이 마치 공놀이처럼 보이지만, 퍼포머들은 사실상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놀이 같지만, 그 안에 숨겨진 노동의 이미지가 겹쳐 보여요.

 

 

트로마라마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즐겼던 ‘베켈(bekel)’ 놀이에서 출발했어요. 고무공을 던지고 금속 조각을 재빠르게 줍는 놀이였죠. 우리는 이 반복적인 던지기 동작을 통해, 오늘날의 노동이 어떻게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해졌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는 곧 스마트 기술 아래에서 개인의 자율성이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 그리고 플랫폼 경제가 개인의 주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죠.

 

AAD
‘베켈’은 한국의 공기놀이와 매우 유사해 보이는데요, 검색해 보니, 과거에는 동물의 뼛조각을 사용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금속 조각으로 대체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놀이의 특징은 작품 제목인 ‘뼈를
던지다(Banting Tulang)’와도 맞물리는군요. 퍼포먼스는 뼛조각을 사용하던 전통놀이, 지칠 줄 모르는 노동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작동 원리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놀이와
노동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네요.

 


2

놀이/노동 & 자율/통제

 

자유 속 노동

 

AAD
퍼포머들은 ‘즐거움’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마치 놀이처럼 보이는 퍼포먼스를 펼칩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도록 설정되어 있어, 어쩌면 하나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퍼포머들이 던지고 있는 이 반복적 행위는 과연 무엇을 위한 노동일까요?

 

트로마라마
사실 이들의 반복적인 공 던지기 행위는 기계적이며, 뚜렷한 목적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분명한 목표 없이도 디지털 플랫폼이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트위터의 해시태그 ‘#pleasure(즐거움)’와 연동된 진동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는가?”

 

AAD
침대에 누워 아무런 목적 없이 쇼츠를 끝도 없이 넘겨보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런 행위는 가끔씩 제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반복되는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처럼 무의미하게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디지털 시대의 어떤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로마라마
맞습니다. 퍼포먼스 속 던지기 행위는 명확한 결과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반복되고, 거의 무의미하죠.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경제에서는 ‘놀이’나 ‘여유’조차 데이터, 조회수, 수익으로 환원됩니다. 퍼포머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상징적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조차 시간, 몸짓, 존재가 수집되고 분석된다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AAD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의식적으로 앱을 열고, ‘좋아요’를 누르고, 스크롤을 내리는 그 모든 순간이 떠오네요. 우리는 ‘놀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모든 행동은 데이터로 수집되고 있죠. 나아가 이런 무의미한 행동들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유도되고 있죠. 결국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채 ‘무료 노동자’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제 속 선택

 

AAD
작품 속 퍼포머들의 반복된 행위는 무려 60분간이나 지속됩니다. 긴 시간 동안 진동에 맞춰 공을 던지려면 퍼포머들에게는 꽤 지루한 ‘노동’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트로마라마
처음에는 (퍼포머들의 행동이 모두) 똑같아 보여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퍼포머마다 신체, 리듬, 지구력이 다르기 때문이죠. 어떤 동작은 느려지고, 어떤 동작은 더 강해지거나 머뭇거립니다. 이런 차이는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겨나며, 반복되는 노동조차 인간적 다양성을 거스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AAD
마치 동일하게 대량 생산된 물건이라 하더라도 사용자가 오랜 시간 사용하는 동안 점차 개성을 띠게 되는 현상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자율성과 통제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어떤 장치를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트로마라마
‘진동 신호’와 ‘던지기’ 라는 고정된 값을 설정했죠.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퍼포머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즉흥성이 개입되는 지점입니다. 시스템이 신체를 유도하되, 그 안에서 개인의 리듬, 피로감, 반응을 허용하는 균형을 만드는 것이죠.

 


침묵 속 움직임

 

AAD
퍼포먼스가 진행되지 않는 시간에도 관람객은 구조물과 오브제, 그리고 퍼포머들의 흔적을 통해 작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반 관람 시간 동안, 퍼포먼스 없이 남겨진 이 요소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나요?

 

트로마라마
퍼포먼스가 없을 때도 구조물과 오브제들은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멈춰진 루프 같죠. 고무공과 베켈 구슬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반복되는 노동과 공허한 놀이의 상징입니다. 비활성 상태에서도 이들은 언제든 다시 작동할 수 있는 준비된 에너지처럼, 디지털 시스템이 우리가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작동되는 상태를 은유합니다.

 



3

핑! 하고 던진 신호에 누가 반응하는가?

 

AAD
트로마라마의 개인전 제목 《Ping Inside Noisy Giraffe》를 한국어로 옮기자면 “소란스러운 기린 안에서 울리는 핑”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핑(Ping)’은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사용하는 기술 용어로, 특별한 목적 없이 단지 두 컴퓨터(또는 기기) 간의 연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퍼포먼스 작품이 전체 전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트로마라마
(‘핑’처럼) 고무공은 누구를 향해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공간 속으로, 끝없는 루프 속으로 던져질 뿐이죠. 우리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해답 없는 노력, 목적 없는 움직임입니다. 디지털 노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플랫폼에 ‘핑’을 보내고 활동, 데이터, 존재를 생성하지만, 도달하는 지점은 없습니다.

 

AAD
우리 역시 일상에서 매일 ‘핑’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인터넷에 남기는 수많은 데이터는 결국 불특정 다수에게 향하고, 그것이 누구에게 도달해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디지털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수많은 ‘핑’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오늘날, 앞으로 우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시나요?

 

트로마라마
기술이 삶 깊숙이 스며들수록, ‘선택’과 ‘명령’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과의 관계가 이제 ‘통제’가 아니라 ‘협상’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기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기술에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며, 때로는 우리가 너무 무의식적으로 순응하는지 돌아보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AAD
우리는 기술에 대해 무심코 따르기만 하지 말고 각자의 맥락 속에서 선택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겠네요. 그러려면 우리가 얼마만큼 이 상황을 자각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트로마라마
그렇습니다. 《PING INSIDE NOISY GIRAFFE》를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인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수많은 행동 중,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일까요? 알고리즘, 알림, 플랫폼이 모든 것을 구조화하는 이 시대에, 주체성과 행위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요?

 


 

오늘날 디지털 환경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지를 스스로 성찰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AAD가 인도네시아 아티스트 그룹 트로마라마의 퍼포먼스 작품 〈Banting Tulang〉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작품을 통해 디지털 시대가 우리의 인식 방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기까지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의지로 쇼츠를 넘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떤 시스템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걸까요?

 


 

트로마라마
인도네시아의 아티스트 콜렉티브 트로마라마는 페비 베이비로즈(Febie Babyrose), 허버트 한스(Herbert Hans), 루디 하투메나(Ruddy Hatumena)가 2006년에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컴퓨터 프로그램, 인터랙티브 설치, 비디오 작업을 통해 기술이 실시간으로 세계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알고리즘 기반 작업을 선보입니다. 트로마라마는 인도네시아의 정치적·문화적 환경을 반영하며, 이러한 감각적 관여 방식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닙니다.
트로마라마는 시카고의 도큐먼트 스페이스(2024), 밴쿠버 Centre A(2017),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2015),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15), 도쿄 모리 미술관(2010)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 외에도 홍콩 M+(2023) 미술관 파사드에서 단독 스크리닝을 진행했으며, 마닐라 현대미술디자인미술관(MCAD, 2018), 싱가포르 아트뮤지엄(2017), 광주비엔날레(2016) 등 여러 국제 단체전에 참여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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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 ㅣ 송은문화재단
작성 및 편집 | AAD 박소옥. AAD 박정은
디자인 | AAD 이혜림